철학자의 하루

철학자들의 하루를 따라가며, 사유하는 습관, 말하는 용기, 걷는 태도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 2025. 6. 22.

    by. 철학자의 하루

    목차

       

      철학은 고요한 반복 안에서 탄생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변두리. 겉보기에 평범한 집 안에서 한 남자가 묵묵히 유리 조각을 갈고 있습니다. 작은 렌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몇 시간씩 연마 도구를 손에서 놓지 않는 이 사람은, 바로 근대 철학의 거장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입니다. 그의 사상은 ‘범신론’이라는 거대한 철학적 전환점을 만들어냈지만, 그 출발은 화려한 강단이나 연단이 아닌, 조용하고 규칙적인 일상 속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스피노자는 렌즈를 갈면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더 정밀한 렌즈를 만들기 위한 그의 손놀림은, 실은 더 명징한 사유를 추구하는 정신의 표상이기도 했습니다. 철학자의 루틴은 종종 그들이 남긴 저서보다 더 진하게 그들의 사유 태도를 드러냅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철학자들은 자신만의 사유 구조를 만들어가며, 철학을 ‘사는 것’으로 구현해 낸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철학자의 하루’ 시리즈 열네 번째 이야기로, 스피노자의 일상 루틴 속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합니다. 특히 렌즈 연마라는 물리적 행위와 그 안에 녹아 있는 사유 방식, 그리고 그의 삶에서 우리가 오늘 얻을 수 있는 실천적 영감까지 깊이 있게 탐구해보겠습니다.

       

       렌즈를 연마하는 손끝에 담긴 사유의 깊이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렌즈를 연마했습니다. 그는 고전 광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뛰어난 손기술을 바탕으로, 갈릴레이나 후커와 같은 당대 과학자들과 렌즈 품질로 견줄 수 있을 정도의 장인정신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렌즈 연마는 단순한 생활 수단을 넘어서, 철학자로서의 사유 훈련이자 정신 수련의 일환이었습니다.

      렌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기술과 인내심, 그리고 깊은 몰입과 집중이 요구됩니다. 작은 기포 하나, 미세한 곡률의 오차도 전체 관찰을 흐트러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정밀함과 침착함이 필요한 작업을 반복하며, 스피노자는 자신만의 사유 근력을 단련해 나갔습니다. 손은 유리를 갈고 있었지만, 정신은 <에티카>의 정리와 정의를 되뇌며 더 투명한 사유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하루는 이른 새벽에 시작되었습니다. 맑은 물을 마시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그는 고요한 방에서 자신의 작업대 앞에 앉았습니다. 유리를 돌리는 그의 손놀림은 기계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안에는 철학자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향한 깊은 명상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철학을 단순한 추상 개념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는 행위로 여겼습니다. 렌즈를 갈며 느끼는 미세한 감각, 유리의 반사, 도구와의 교감은 그에게 있어 인간 존재와 자연, 신 사이의 조화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철학은 머릿속 개념이 아니라, 손끝에서 살아 숨 쉬는 실천적 지혜였던 것입니다.

       

      질서 있는 삶이 만든 기하학적 사유

       

      스피노자의 대표작인 <에티카(Ethica)>는 고대 유클리드의 기하학처럼 정의, 공리, 정리, 증명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적이고 절제된 구성은 단지 철학적 재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질서 정연한 일상 루틴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하루는 매우 일정한 패턴을 유지했습니다. 오전에는 렌즈를 연마하면서 독서를 병행하고, 점심 이후에는 가볍게 산책을 하거나 가까운 지인들과 조용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후에는 글을 쓰며 사유를 정리하고, 해가 지면 되도록 빨리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러한 질서 있는 생활은 단순한 시간관리 차원이 아닌, 자신의 감정과 인식을 조율하는 구조적 장치였습니다.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과 정념에 대해 분석하며, 우리가 충동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의 인식과 자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루틴은 바로 그 자각을 기르는 수련의 장이었습니다. 규칙적인 일상 속에서 그는 감정을 관찰하고 정리하며, 자신을 능동적인 존재로 단련해 나갔습니다.

      특히 스피노자는 스토아주의의 영향을 받아, 외부 사건보다는 자신의 내면 반응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분석하며 삶에 활용하는 방향으로 철학을 실천했습니다. 결국 철학은 일상이라는 그릇 안에서 구체화되며, 루틴은 사유의 장(場)이자 실천의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념을 넘어 자유로 가는 루틴의 힘

       

      스피노자가 추구한 철학의 중심에는 ‘자유’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자유는 욕망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스피노자는 진정한 자유란, 자신의 본성과 감정, 정념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감정과 정념을 ‘우리의 능동성이 박탈된 상태’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외부 자극이나 내면의 충동에 지배당할 때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한 억제가 아니라, 더 넓은 시야의 인식과 사유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철학자의 하루 - 스피노자의 렌즈 연마와 사유의 루틴
      철학자의 하루 - 스피노자의 렌즈 연마와 사유의 루틴


      스피노자의 루틴은 이러한 철학을 실천하는 도구였습니다. 매일의 렌즈 연마는 단조로운 행위이지만,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감정을 관찰하며, 충동을 통제하는 훈련을 반복했습니다. 이는 현대의 명상이나 마음 챙김과도 유사한 방식으로, 감정을 억누르기보다는 알아차림과 통찰을 통해 초월하는 접근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자주 감정에 휘둘리며, 삶의 중심을 잃기 쉽습니다. 이럴 때 스피노자의 루틴은 깊은 시사점을 줍니다. 일상 속 반복되는 습관이야말로 감정을 통찰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가장 현실적인 훈련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정념을 넘어 자유로 가는 길은, 사소해 보이는 루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일상의 반복이 철학이 되는 순간


      스피노자의 하루는 매우 단순하고 조용했습니다. 격정적인 언변도, 외부와의 과도한 교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 사상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철학을 ‘말’이 아닌 ‘삶’으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렌즈 연마라는 반복적인 작업, 규칙적인 산책과 독서, 감정의 객관적 관찰. 이 모든 행위들은 단지 하루를 채우는 행동이 아니라, 철학을 구성하는 일상의 틀이었습니다. 그 틀 안에서 스피노자는 자유를 찾고, 정념을 초월하고, 신과 자연의 본질을 사유했습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 속에서 각자의 렌즈를 연마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 디자인을 하는 것, 산책을 하는 것, 커피를 내리는 것… 그 모든 사소한 루틴 속에 사유가 깃든다면, 그것은 곧 철학이 됩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분들의 일상 역시, 철학자의 하루가 될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습관 안에서 감정을 관찰하고, 자신을 이해하고, 내면의 자유를 키워나가며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이미 ‘철학자의 하루’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